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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 계급주의의 현실의 결말과 미래

by 렉돌 2024. 6. 2.

영화-설국열차-영화-포스터
영화 설국 열차

설국열차, 계급주의 타파를 시도하다

온 세계가 얼어붙은 지금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은 설국열차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추위라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차라는 사회로 뛰어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그 사회 속에서 또 다른 생존의 위협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꼬리칸부터 머리칸까지 칸별로 나누어진 기차 안의 공간, 그 공간을 나누는 벽은 단순한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 그들의 계급을 규정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한 번 꼬리칸에 탑승하면 영원히 꼬리칸입니다. 부모가 꼬리칸인 아이도 영원히 꼬리칸입니다. 그리고 그 계급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없이 평생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꼬리칸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의 분노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머리칸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그런 사람들의 분노를 모아 혁명으로 이끌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저 벽을 넘어서 이 열차를 지배하고 있는 윌포드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지도자를 앉히는 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지도자 꼬리칸. 사람들은 커티스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세상이란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곳일 겁니다. 설국 열차가 처음 출발할 때 탑승칸을 정했던 기준은 바로 그들이 갖고 있는 돈이었습니다. 부의 차이가, 계급을 결정했던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는 다수가 가난한데도 소수는 여전히 사치를 부리는 설국 열차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업가이며 자본가였던 윌포드는 이제 하나의 국가가 되어 정부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설국열차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혁명의 카타르시스를 영화를 통해서라도 보여줬으면 관객들은 더 많은 환호를 이 작품에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조금 다른 선택을 합니다. 분노만으로 이루어진 꼬리칸의 혁명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너무도 냉정한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현실

길리엄은 커티스에게 묻습니다. 머리칸과 엔진을 차지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말이죠. 이건 혁명 이후의 세상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세상을 뒤집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지만 분노만으로 그 이후의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분노하며 머리칸까지 달려온 커티스는 자신의 혁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거기엔 더 이상 분노하고 파괴할 적이 아니라 직접 고민하고 만들어 나가야 할 세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봉준호는 혁명의 성공이라는 매력적인 기승전개를 포기하고 이렇게 뭔가 좀 허탈한 것 같은 느낌의 찝찝한 결말을 내놓은 것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커티스 혁명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인물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모두 백인이라는 점입니다. 설국 열차에는 다양한 인종이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커티스 혁명을 이끌고 방해하고 무너뜨리는 주요 인물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백인입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백인이 주도해서 만들어 놓은 서양 세계의 체제와 사고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설국열차도 이와 마찬가지로 백인인 윌포드가 주도하여 만든 세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세계의 기존 질서에 맞서야 할 혁명이 또다시 백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커티스가 백인이라는. 즉, 그의 혁명도 결국 기존 세계의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그래서 커티스의 혁명은 기존 세계의 질서를 바꾸기는커녕 그대로 이어나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커티스가 윌퍼드의 궤변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커티스 혁명의 그런 한계점을 더욱더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었을 것입니다.

인종차별이 없는 미래

봉준호는 이렇게 서양적인 것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내놓습니다. 바로 황인과 흑인으로 상징되는 제3의 길, 기존 체제로부터의 탈출입니다. 그리고 봉준호는 그 대안에 아이들이라는 상징성까지 더 얹습니다. 그러므로 봉준호 감독이 정말 얘기하고 싶었던 바는 백인과 어른으로 대변되는 기존 체제를 벗어나 유색 인종과 아이들로 은유되는 새로운 체제와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커치스도 지금에 와서는 혁명과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그가 스스로 고백했듯 한때는 이 세계를 더 잔인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난곡 민수도 황인이면서 기차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제3의 길을 생각해 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이 세 개의 대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도 이 열차의 보안 설계자로서 일하며 현재의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어른의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봉준호는 백인 어른들이 만든 기차로부터 벗어난 유색 인종의 아이들이라는 결말을 우리들에게 내놓은 것입니다. 비록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런 자신을 희생해서 새로운 미래를 이어나갈 아이들을 지켜낸 이 어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희망이란 건 정말로 모든 생명이 얼어붙었던 세계에 다시 나타난 북극곰처럼 비현실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봉준호 감독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북극 꿈을 이렇게 클로즈업하면서 영화를 끝내는 것으로 자신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